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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vs 삼성 - 번트 없는 야구의 묘미

테크인코리아 2008. 10. 17. 11:33

번트가 사라졌다.

무사 1루, 심지어 무사 1루와 2루에서도 희생 번트는 나오지 않았다.

감독들이 타자들의 '스윙'에 믿음을 거는 야구가

16일 2008 프로야구 두산과 삼성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나왔다.

이날의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선이 굵은 야구는 김경문 두산 감독과 선동렬 삼성 감독의 공동 연출작이다.

단기 승부인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이 선취점의 중요성,

그리고 이를 위한 치밀한 작전야구였다.

작전 야구의 기본은 물론 번트.

경기 초반이라도 무사 1루나 무사 1루와 2루 상황이면

번트 작전이 나온다에 내기를 걸어도 별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서는 번트 여부를 놓고 내기를 걸었다면

승률은 '0이거나 형편없거나' 였을 것이다.

먼저 승부를 건 것은 선동렬 감독이었다.

3회 초 신명철과 박한이의 연속 안타로 무사 1루와 2루 상황.

"두산과의 경기에서는 5회 이전에도 번트를 대겠다" 던

선동렬 감독의 공언대로라면 누가봐도 분명 번트 상황이었다.

특히 삼성은 1회초 진갑용의 우익수 앞 안타를 우익수 앞 땅볼로 만들어 버린 양준혁의 주루 실수로

아깝게 득점 기회를 놓친 터였다.

게다가 타석에는 2번 타자 조동찬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취점을 뽑을 찬스에서 2번 타자에게 흔히 주어지는 임무는 주자들을 진루시키는 보내기 번트다.

하지만 조동찬은 번트 자세를 취하는 척만 했다.

선 감독이 선택한 것은 번트가 아닌 '버스터'였다.

조동찬이 때린 공이 파울이 되면서 작전은 실패했지만 결국 볼넷을 얻었다.

번트를 하지 않은 대가는 주자가 한 명 더 불어난 무사 만루였다.

삼성은 이후 양준혁과 진갑용의 안타와 희생플라이를 묶어 4점을 쓸어 담았다.

번트를 버린 선동렬 감독의 변신이 빚어낸 달콤한 대량 득점이었다.

4회말 이번엔 두산이 무사 1·2루의 기회를 잡았다.

주자를 진루시키기 위해 아웃카운트를 희생하지 않으려 하는 김경문 감독의 성향상 번트가 나올 리는 없었다. 게다가 타석엔 팬들의 가장 큰 환호를 받고 들어선 4번 타자 김동주가 서 있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강공의 결과는? 역시 대량 득점이었다.

삼성의 4점에 1점 못 미치는 3점에 그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말이다.

특히 두산의 득점은 과정이 극적이었다.

믿었던 김동주가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나고 홍성흔의 희생플라이로 1점을 얻으면서

아웃카운트는 순식간에 투아웃이 됐다.

무사 1, 2루에서 타석에 선 것이 김동주가 아니라 다른 선수였고

번트를 댔으면 어땠을까라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 무렵, 고영민의 3루타가 터져나왔다.

배영수의 가운데로 몰린 변화구를 걷어낸 것이 우익선상의 절묘한 위치에 떨어지면서

기어코 2점을 더 얻어내고 말았다.

5회말 동점을 만든 두산의 공격도 무사 1, 2루에서 시작됐다.

이번엔 2번 타자 오재원이 타석에 섰다.

5회 이후 역전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삼성의 막강 불펜을 고려한다면

아쉬운 대로 우선 동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재원도 전 타석에서 안타가 있었지만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러보는 신참이었다.

물론 경기 후반이긴 했지만 가끔 한 두점이 아쉬운 승부처에서는 번트 사인을 내기도 하는

김경문 감독의 전력에 비추어 보면 번트가 100% 아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날 경기가 1~2점차 승부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김 감독은 이번에도 강공을 선택했고 오재원은 1타점 적시타를 감독에게 선물했다.

이어 나온 타자들이 맥없이 물러나면서 추가 득점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힘으로 승부를 건 선동렬 감독에, 힘으로 화답한 김경문 감독,

두 감독의 '번트 실종' 야구는 5회까지 무승부를 기록했다.

승부가 갈린 7회 말도 역시 시작은 무사 1, 2루였다.

경기 종반이었음에도 물론 번트는 없었다.

이번에도 타석에 선 김현수가 볼넷을 얻어나가면서 무사 만루.

번트를 포기하면 주자가 늘어난다는 것이 이날 경기의 '법칙'이었다.

불어난 주자들은 삼성의 수비를 무너뜨렸다.

김동주의 앝은 외야플라이를 우익수 최형우가 뒷걸음 치며 잡아낸 것이 화근의 시작이었다.

편하게 잡기만 했어도 '우익수 플라이'로 기록됐을 김동주의 타구는

어설픈 수비 덕분에 본인을 희생해서 타점을 올린 '희생플라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달게 됐다.

그리고 '어설픔'은 쉽게 전염됐다.

3루수 조동찬은 평범한 땅볼을 제대로 글러브에 포구하지 못하면서 1점을 헌납했다.

이어 고영민의 땅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박진만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틈을 타 김현수가 2루에서 홈까지 파고드는 데 성공.

순식간에 점수는 7-4로 벌어지고 말았다.

김경문 감독은 8회말, 안타를 치고 나간 채상병을 진루시키기 위해

희생번트를 지시하는 '작은 반전'을 통해 1점을 더 보탰다.

사실 이날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 계기는 4회 초에 있었다.

선두 타자로 나선 신명철이 안타로 출루해 삼성은 다시 무사 1루의 기회를 잡았다.

4-0으로 앞서 있던 삼성이 한 두점만 더 달아난다면 승리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상황,

게다가 투수는 좌완 이혜천에 다음 타자는 좌타자 박한이였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만 이번 시즌 박한이는 이혜천과 두 번 만나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동렬 감독은 박한이에게 '때리라'는 사인을 냈다. 그리고 성공했다.

다만 박한이의 배트에 공이 맞아나가는 순간까지만.

박한이의 배트를 맞고 나온 공은 안타가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춘 강한 직선타구였지만

2루수 고영민의 글러브를 뚫지 못했다.

안타를 직감했던 1루주자마저 귀루하지 못하고 아웃되면서 순식간에 투아웃.

이 수비 하나로 경기의 분위기는 두산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4-0의 리드가 뒤집힌다면 그것은 고영민의 이 수비 하나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예감은 회가 거듭해 갈수록 현실이 되었다.

이 수비가 나온 이후 삼성은 정재훈의 구위에 눌려 단 한번도 무사 1루나 무사 1·2루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반면 두산은 이후 4번의 무사 1루와 무사 1·2루의 기회를 잡았고 역전승을 거뒀다.

역사처럼 스포츠에서도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삼성이 4-0으로 앞선 상황에서

번트를 통해 1~2점이라도 더 득점했으면 어땠을까.

경기 분위기상 두산의 투수진 운용도 달라졌을 것이고 아마 이날 승리를 가져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삼성은 승리 대신 번트 없는 야구의 재미를 팬들에게 선사했다.

그것만으로도 팬들은 즐겁다. 기쁨은 꼭 승리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지사진ⓒ 유성호 오마이뉴스 이승훈 기자

플레이오프전

 

두산 vs 삼성

1차전 - 10월 16일 목요일 잠실 - 두산 8 : 4 삼성
2차전 - 10월 17일 금요일 잠실

3차전 - 10월 19일 일요일 대구, 1시 30분
4차전 - 10월 20일 월요일 대구
5차전 - 10월 21일 화요일 대구

6차전 - 10월 23일 목요일 잠실
7차전 - 10월 24일 금요일 잠실